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 ‘힙’한 동네로 떠오르면서 재조명되고 있는 지역, 을지로. 을지로4가역 입구에 다다르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쌓인 낡은 건물과 색이 바랜 네온사인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쇳소리가 울려 퍼지는 을지로 골목골목에는 오래된 인쇄소와 작은 규모의 술집이 다닥다닥 어깨를 맞댄 채 붙어 있다. 다소 무질서한 골목 사이에는 이곳이 을지로임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는 상징물이 있다. 옛 느낌을 물씬 풍기면서도 통일성을 유지한 간판의 서체가 바로 그것. 을지로 골목을 채우고 있는 간판은 그 자체로 을지로의 얼굴 역할을 하고 있었다.
▲ <을지로체 – 도시와 글자> 전시가 열린 앤에이갤러리 ⓒ전용언
을지로의 간판은 글자를 구성한 각각의 획마다 힘이 가득 느껴진다. 이 간판에 새겨진 서체는 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장인의 손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이른바 ‘간판 할아버지’라 불렸던 장인이 1960년부터 90년대까지 자전거를 타고 공구거리를 돌아다니며 간판에 글씨를 새겼던 것. 한 무명의 장인이 을지로 골목 전체에 지역을 대표하는 색채를 입힌 셈이다. ‘간판 할아버지’는 소리도 없이 사라졌지만, ‘배달의 민족’이 을지로체 제작을 기념해 선보인 <을지로체 – 도시와 글자> 전시에서 그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다.
배달 중개 어플리케이션 서비스인 배달의 민족은 이미 7년 전부터 한글 서체에 주목하며 폰트 개발 작업을 이어왔다. 을지로체는 이들이 지금까지 선보인 폰트처럼 옛 간판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다. 을지로체는 그들이 선보인 8번째 폰트로, 페인트 붓글씨 특유의 느낌을 살린 을지로 일대 가게의 간판을 바탕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다만, 이번 을지로체는 단순히 한 종류의 서체를 개발, 배포하는 것이 아니라, 간판과 광고판, 종이스티커 등 글자에 서린 을지로의 멋과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도록 기획했다. 그 덕분일까. 을지로체를 매개로 반세기가 훌쩍 넘는 원도심의 서사와 이름 없는 장인의 이야기에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 새로운 폰트 '을지로체'의 모티브가 된 간판들 ⓒ전용언
▲ 블루투스 키보드로 을지로체를 체험할 수 있는 모니터. 누군가 을지로체를 사용해 채워 넣은 말은 ‘행복하자’였다. ⓒ전용언
▲ 을지로의 상인들이 간판의 글씨를 그려준 무명의 장인을 회상하는 내용의 영상 ⓒ전용언
이제는 쉽게 볼 수 없는 조명 가게와 철물점을 지나 을지로 한복판에 자리한 앤에이갤러리에 도착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2층에 들어서자 벽면과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양각색의 간판 프린팅이 보였다. 덕분에 시선이 닿는 곳마다 다양한 간판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을지로체로 쓰인 간판 외에도 배달의 민족이 이전에 배포했던 ‘한나체’와 ‘주아체’, ‘도현체’로 쓰인 간판이 있었다. 전시장 2층 한가운데에 을지로체의 토대가 된 ‘대우기계’ 간판과 을지로체로 원하는 글자를 써볼 수 있는 블루투스 키보드와 모니터가 있었다. 그리고 옆 공간에는 을지로체의 제작 과정이 담긴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을지로 일대의 상인들이 간판 글씨를 새기던 무명의 장인을 회상하는 내용의 2분 남짓한 영상으로, 배달의 민족이 을지로에 주목한 이유와 서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의 최소 단위로 글자가 있고, 글자가 도시의 메시지와 생기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 도슨트가 폰트 제작 계기와 ‘폰트 할아버지’ 등 을지로체의 탄생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용언
마침 도슨트 시간에 맞춰 간 덕분에 몇 가지 이야기를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요식업과 유통업에 종사하는 기업이 폰트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이유에 대해 묻자, 큐레이터는 ‘서체는 콘텐츠를 담는 그릇’이고 그것이 기업의 철학을 대변한다고 답했다. 서체라는 건 가수의 음색과 같은 것이라 을지로체를 보고 도시나 브랜드를 연상할 수 있다는 설명 또한 덧붙였다.
▲ 창틀에 적힌 ‘생존환경이 만들어 낸 아티스트’,
이번 전시는 을지로 골목이 만들어낸 폰트 할아버지를 재조명하는 목적도 있다. ⓒ전용언
▲ 을지로체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간판. 장인의 손맛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서체 ⓒ전용언
▲ 전시에 마련된 포토존. 유쾌한 문구가 돋보인다. ⓒ전용언
3층으로 올라가는 통로에도 눈길을 사로잡는 문구가 있었다. ‘생존환경이 만들어 낸 아티스트’ 창틀에 새겨진 이 한 문장은 이 전시가 조명하는 이름 없는 장인의 삶을 관통하는 설명이었다. 작은 공간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는 기획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었다. 3층에는 적색과 흑색으로 쓴 강렬한 손글씨체 간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 을지로체로 쓰인 2,350자의 서체 ⓒ전용언
가장 인상적인 것은 커다란 종이를 까맣게 채운 을지로체 글자였는데, 그 수가 무려 2,350자에 달했다. 폰트 제작은 전체 작업의 토대가 되는 200여 개의 글자를 손으로 직접 써내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을지로체로 채운 커다란 벽면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동안 들인 폰트 제작 과정의 정성과 수고가 생생히 느껴졌다. 전시의 마지막에는 을지로체로 된 명함을 만들 수 있었다. 장인의 손맛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을지로체로 이름 석 자를 새긴 후 갤러리를 나섰다.
▲ 골목의 얼굴인 을지로의 간판들 ⓒ전용언
을지로체를 소개하는 영상에서 말한 ‘한 시대에 통용되는 가장 멋스러운 생각은 글자에 반영된다’는 의견에 나도 동의한다. 이번 전시는 비단 온라인에서 배포되는 폰트를 전시로 옮겨왔다는 데에만 의미가 있지 않다. ‘을지로스러움’이 무엇인지 충실히 보여주는 을지로체를 통해, 과거 부흥기를 누린 도시의 모습과 현재 을지로 골목의 간극을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서체로 도시를 기억하는 것이 가능함을 알았다. 을지로체를 만난다면 한동안은 을지로 골목 특유의 소음과 냄새를 절로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을지로체, 서체로 도시를 기억하다
<을지로체 – 도시와 글자> 전시 방문기
인문쟁이 전용언
2019-11-26
▲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을지로 골목 ⓒ전용언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 ‘힙’한 동네로 떠오르면서 재조명되고 있는 지역, 을지로. 을지로4가역 입구에 다다르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쌓인 낡은 건물과 색이 바랜 네온사인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았다. 쇳소리가 울려 퍼지는 을지로 골목골목에는 오래된 인쇄소와 작은 규모의 술집이 다닥다닥 어깨를 맞댄 채 붙어 있다. 다소 무질서한 골목 사이에는 이곳이 을지로임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는 상징물이 있다. 옛 느낌을 물씬 풍기면서도 통일성을 유지한 간판의 서체가 바로 그것. 을지로 골목을 채우고 있는 간판은 그 자체로 을지로의 얼굴 역할을 하고 있었다.
▲ <을지로체 – 도시와 글자> 전시가 열린 앤에이갤러리 ⓒ전용언
을지로의 간판은 글자를 구성한 각각의 획마다 힘이 가득 느껴진다. 이 간판에 새겨진 서체는 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장인의 손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이른바 ‘간판 할아버지’라 불렸던 장인이 1960년부터 90년대까지 자전거를 타고 공구거리를 돌아다니며 간판에 글씨를 새겼던 것. 한 무명의 장인이 을지로 골목 전체에 지역을 대표하는 색채를 입힌 셈이다. ‘간판 할아버지’는 소리도 없이 사라졌지만, ‘배달의 민족’이 을지로체 제작을 기념해 선보인 <을지로체 – 도시와 글자> 전시에서 그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다.
배달 중개 어플리케이션 서비스인 배달의 민족은 이미 7년 전부터 한글 서체에 주목하며 폰트 개발 작업을 이어왔다. 을지로체는 이들이 지금까지 선보인 폰트처럼 옛 간판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다. 을지로체는 그들이 선보인 8번째 폰트로, 페인트 붓글씨 특유의 느낌을 살린 을지로 일대 가게의 간판을 바탕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다만, 이번 을지로체는 단순히 한 종류의 서체를 개발, 배포하는 것이 아니라, 간판과 광고판, 종이스티커 등 글자에 서린 을지로의 멋과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도록 기획했다. 그 덕분일까. 을지로체를 매개로 반세기가 훌쩍 넘는 원도심의 서사와 이름 없는 장인의 이야기에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 새로운 폰트 '을지로체'의 모티브가 된 간판들 ⓒ전용언
▲ 블루투스 키보드로 을지로체를 체험할 수 있는 모니터. 누군가 을지로체를 사용해 채워 넣은 말은 ‘행복하자’였다. ⓒ전용언
▲ 을지로의 상인들이 간판의 글씨를 그려준 무명의 장인을 회상하는 내용의 영상 ⓒ전용언
이제는 쉽게 볼 수 없는 조명 가게와 철물점을 지나 을지로 한복판에 자리한 앤에이갤러리에 도착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2층에 들어서자 벽면과 바닥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양각색의 간판 프린팅이 보였다. 덕분에 시선이 닿는 곳마다 다양한 간판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을지로체로 쓰인 간판 외에도 배달의 민족이 이전에 배포했던 ‘한나체’와 ‘주아체’, ‘도현체’로 쓰인 간판이 있었다. 전시장 2층 한가운데에 을지로체의 토대가 된 ‘대우기계’ 간판과 을지로체로 원하는 글자를 써볼 수 있는 블루투스 키보드와 모니터가 있었다. 그리고 옆 공간에는 을지로체의 제작 과정이 담긴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을지로 일대의 상인들이 간판 글씨를 새기던 무명의 장인을 회상하는 내용의 2분 남짓한 영상으로, 배달의 민족이 을지로에 주목한 이유와 서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보의 최소 단위로 글자가 있고, 글자가 도시의 메시지와 생기를 만든다고 생각해요.”
▲ 도슨트가 폰트 제작 계기와 ‘폰트 할아버지’ 등 을지로체의 탄생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용언
마침 도슨트 시간에 맞춰 간 덕분에 몇 가지 이야기를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요식업과 유통업에 종사하는 기업이 폰트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이유에 대해 묻자, 큐레이터는 ‘서체는 콘텐츠를 담는 그릇’이고 그것이 기업의 철학을 대변한다고 답했다. 서체라는 건 가수의 음색과 같은 것이라 을지로체를 보고 도시나 브랜드를 연상할 수 있다는 설명 또한 덧붙였다.
▲ 창틀에 적힌 ‘생존환경이 만들어 낸 아티스트’,
이번 전시는 을지로 골목이 만들어낸 폰트 할아버지를 재조명하는 목적도 있다. ⓒ전용언
▲ 을지로체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간판. 장인의 손맛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서체 ⓒ전용언
▲ 전시에 마련된 포토존. 유쾌한 문구가 돋보인다. ⓒ전용언
3층으로 올라가는 통로에도 눈길을 사로잡는 문구가 있었다. ‘생존환경이 만들어 낸 아티스트’ 창틀에 새겨진 이 한 문장은 이 전시가 조명하는 이름 없는 장인의 삶을 관통하는 설명이었다. 작은 공간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는 기획의 세심함을 엿볼 수 있었다. 3층에는 적색과 흑색으로 쓴 강렬한 손글씨체 간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 을지로체로 쓰인 2,350자의 서체 ⓒ전용언
가장 인상적인 것은 커다란 종이를 까맣게 채운 을지로체 글자였는데, 그 수가 무려 2,350자에 달했다. 폰트 제작은 전체 작업의 토대가 되는 200여 개의 글자를 손으로 직접 써내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을지로체로 채운 커다란 벽면을 바라보고 있으니, 그동안 들인 폰트 제작 과정의 정성과 수고가 생생히 느껴졌다. 전시의 마지막에는 을지로체로 된 명함을 만들 수 있었다. 장인의 손맛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을지로체로 이름 석 자를 새긴 후 갤러리를 나섰다.
▲ 골목의 얼굴인 을지로의 간판들 ⓒ전용언
을지로체를 소개하는 영상에서 말한 ‘한 시대에 통용되는 가장 멋스러운 생각은 글자에 반영된다’는 의견에 나도 동의한다. 이번 전시는 비단 온라인에서 배포되는 폰트를 전시로 옮겨왔다는 데에만 의미가 있지 않다. ‘을지로스러움’이 무엇인지 충실히 보여주는 을지로체를 통해, 과거 부흥기를 누린 도시의 모습과 현재 을지로 골목의 간극을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었다. 서체로 도시를 기억하는 것이 가능함을 알았다. 을지로체를 만난다면 한동안은 을지로 골목 특유의 소음과 냄새를 절로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019 [인문쟁이 5기]
멋대로 씁니다.댓글(0)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을지로체, 서체로 도시를 기억하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이전글이 없습니다.
다음글이 없습니다.
관련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