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전은 인류 역사에서 늘 사회 구조와 개인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을 촉발했고, 인터넷은 정보혁명을 일으켰듯, 오늘날 AI의 급속한 발전은 지식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근본적으로 뒤바꾸고 있다. 특히 인간의 지적 활동마저 자동화될 수 있는 AI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직업 안정성은 급격히 약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제 지식 노동자들은 단순히 기술 변화에 대응하는 것을 넘어 노동의 본질과 가치를 재정립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AI 혁신은 동시에 노동의 창의성과 놀이적 특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패러다임도 제시한다. 네덜란드 철학자 요한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 개념은 이러한 미래 노동관 형성의 중요한 이론적 틀이 될 수 있다. AI가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인 창의력과 놀이성을 재발견하며 노동을 삶의 즐거움과 개인적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AI가 초래할 노동 혁명의 양상과 이에 따른 새로운 노동 철학의 필요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AI 혁신에 따른 지식 노동자의 운명
“인간이 도구를 만들지만, 그 도구가 다시 인간을 변화시킨다(We Shape Our Tools, and Thereafter Our Tools Shape Us).” 캐나다의 미디어 학자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남긴 이 말은 오늘날 AI가 일으키고 있는 변화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인류는 증기기관을 통한 산업혁명,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한 정보혁명을 거쳐 이제 ‘AI 혁명’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이 혁명은 그 어떤 기술혁신 보다 빠른 속도로 전개되면서, 우리의 삶과 노동 환경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오픈AI의 공동창업자이자 CEO인 샘 알트먼(Sam Altman)은 AI의 발전을 다섯 단계로 구분했다. 알트먼의 다섯 단계는 우리가 현재 AI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나갈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대화형 AI(Conversational AI)’ 단계다. ChatGPT와 같은 시스템이 이에 해당하며, 사용자는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질문을 명확하게 설정해야 한다. 이는 사용자가 해당 분야에 대해 AI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ChatGPT-3.5까지의 버전은 단순히 사용자의 명령에 반응하는 수준이며, 현재도 코드 생성, 이미지 생성, 문서 초안 작성 등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작업에서 활용되고 있다.
두 번째는 ‘추론 AI(Reasoning AI)’ 단계다. 추론 AI는 단순한 응답을 넘어서, 논리적 사고와 추론을 통해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최근 발표된 GPT-4.5는 인간과 유사한 사고 능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며, 튜링 테스트를 최초로 통과한 AI로 기록되었다. UC 샌디에이고 연구진의 실험에 따르면 GPT-4.5는 73%의 확률로 실제 인간으로 오인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 로펌 Baker & Hostetler는 ROSS라는 AI를 도입해 판례 분석을 자동화하고 있으며, 이는 AI의 법률 분야 진입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AI가 두 번째에서 세 번째 단계로 진화하면서 ‘지식 노동자’의 가치가 급격히 하락할 수 있다. 이미 대규모 데이터 분석이나 법적 서류 작성, 금융 자산 관리와 같은 업무는 이미 상당 부분 자동화가 가능해졌다. 최근에는 디지털 아트 및 콘텐츠 제작 분야에서도 AI 사용으로 작업 효율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해당 분야의 신규 인력 고용이 감소하고 있으며, 기존 인력의 급여 또한 낮아지고 있다. 앞으로는 영상 제작이나 일반 사무 업무 등 다양한 직종에서도 AI의 도입이 확대되며 동일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는 ‘자율 AI(Autonomous AI)’로, 특정 분야에서 인간과 동등한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사용자의 개입 없이도 AI가 독립적으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네 번째 단계는 ‘혁신 AI(Innovating AI)’로 인간보다 뛰어난 성과를 내고, 창의성까지 갖춘 존재다. 이 단계에서는 AI가 단순한 작업 수행을 넘어, 새로운 방식을 창안하고 자율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다.
세 번째 단계에서 네 번째 단계로의 전환기에는 법률, 회계, 의료, 교육, 금융, 연구 등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지식 노동자들도 AI로 빠르게 대체될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JP모건이 도입한 계약서 분석 AI ‘COIN’은 기존 인력이 수년간 수행하던 업무를 수초 만에 처리한다. 이는 앞으로 많은 전문직 분야에서 대량 해고 사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예고한다. AI의 확산과 함께 지식 노동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육체 노동자가 지식 노동자의 가치를 추월하는 역전 현상도 발생할 수 있다. 이후 물리적 ‘AI(Physical AI)’와 결합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육체 노동 시장까지 진입하면서 육체 노동의 가치 또한 급감할 것으로 예상된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인 ‘조직 AI(Organizational AI)’는 ‘범용 인공지능(AGI,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의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AI가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학습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업무를 자율적으로 조율하며 수행할 수 있다. 전략 수립, 인사 관리, 조직 운영 전반에 이르기까지, 인간 없이도 기업과 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의 노동 수요는 급격히 줄어들 것이며, 특히 고위 관리자나 임원과 같은 직군조차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노동 시장뿐 아니라 사회 구조 전반에 걸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
AI 발전의 궁극적 단계는 ‘초지능(ASI, Artificial Super Intelligence)’이다. 이는 자아와 독립적 사고 능력을 갖춘 AI로, 인간의 개입 없이 ‘재귀적 자기 개선(Recursive Self-Improvement)’을 통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초지능 단계인 ASI는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 제시한 ‘특이점(Singularity)’의 개념과 맞닿아 있으며, ASI는 모든 인류의 지능을 합친 것보다 뛰어난 수준의 지능을 보유하게 된다. ASI가 실현될 경우, 인간은 AI가 내놓는 해결책을 이해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며, 인류는 AI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국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샘 알트먼은 AGI 도달까지 약 10년을 예상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3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의견도, 또는 아예 도달 불가능하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러나 AI 기술의 발전 속도를 감안할 때, AGI의 등장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시각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결국, AI의 급속한 발전은 인간의 삶의 방식과 사회의 작동 원리, 노동의 본질까지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은 어떤 역할을 맡고, 어떤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는 인류가 앞으로 마주할 가장 본질적이고도 시급한 질문이 될 것이다. 그러나 AI 혁신이 반드시 부정적 결과만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산업혁명과 정보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AI 혁명 역시 새로운 형태의 일과 직업을 탄생시키고, 인간 본연의 특성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와 미래 노동관
산업혁명 이후, 칼 마르크스가 제시한 “노동은 인간의 본질을 실현하는 가장 인간적인 활동”이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사회 전반에 강력한 노동관으로 자리잡아 왔다. 그러나 AI가 급격히 사회를 재편하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노동관은 점점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노동은 더 이상 단순한 생계 수단에 머물지 않고, 개인의 관심, 재미, 즐거움, 창의적 성취를 실현하는 활동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노동관의 정립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개념은 미래 노동관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호이징가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 중 하나로 ‘놀이’를 강조하며, 놀이가 단지 여가나 현실 도피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가장 자유롭고 창의적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본질적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놀이가 사회와 문화의 발전을 촉진하는 근간임을 강조하며, 그 자유로운 특성이 상상력과 창의성을 자극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호이징가의 관점은 오늘날 노동과 놀이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현실을 이해하는 데 유효하다. 특히 21세기 들어 등장한 다양한 직업들—유튜버, 스트리머, 인플루언서, 크리에이터 등—은 노동과 놀이를 융합한 새로운 형태로, 전통적인 노동 개념의 경계를 확장시키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성과 창의성을 기반으로 ‘즐기며 일하는’ 모델을 구현하며, ‘놀이-노동(hybrid work-play)’이라는 새로운 노동 패러다임을 실현하고 있다.
앞으로의 노동관은 이처럼 놀이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개인의 내면적 만족과 자기실현을 중심으로 재정립될 가능성이 크다. 과거에는 노동이 생존과 경제적 보상을 위한 수단이었다면, 이제는 즐거움과 창의적 표현, 나아가 사회적·문화적 기여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미래 사회에서는 높은 수입이나 지위보다, 자신이 진정으로 몰입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특히, AI 기술이 보편화될 미래에는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노동은 사라지고, 인간 고유의 창의력과 감성을 요구하는 직업들이 중요해질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놀이적 요소는 노동의 필수 조건으로 자리잡을 것이며, 사람들은 일하는 과정에서 더 큰 흥미와 만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AI의 발전은 인간을 의무적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으로 노동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인간은 AI로 인해 발생한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자기 관심사와 놀이적 활동에 투자함으로써 노동의 새로운 의미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에는 과제도 따른다. 먼저, 놀이-노동의 일상화는 노동 시간과 여가 시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과로와 ‘일-생활 균형’ 붕괴의 우려를 낳을 수 있다. 아울러, 성과 중심 조직 문화가 약화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놀이와 노동이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 사회적·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수적이다.
AI 혁명은 분명히 기존의 노동 구조를 해체하고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 개념은 미래 노동관을 정립하는 데 있어 가치 있는 지침을 제공한다. 놀이를 포함한 노동은 AI 시대에도 인간의 고유 역량을 강화하고, 더 의미 있고 풍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로 기능할 것이다. 결국, AI 시대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인 ‘호모 루덴스-놀이의 인간’을 회복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 줄 것이다.
- University of Oklahoma, Norman, USA. College of Arts and Sciences (1992 – 1996) - Hitotsubashi University, Japan, Graduate School of Law (1998 – 2000) - University of Hawaii, Honolulu, HI, USA. Political Science(Futures Studies) (2000 – 2007)
주요 경력
- KT경제경영연구소(선임연구원)
- 한국행정연구원(연구위원)
연구분야
- 주요 분야: Futures Studies, Strategic Foresight, Governance, Theories of Social Change
- 관심 분야: Demographic change, Intergenerational JusticeTechnological Forecasting and Social Changes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노동에서 놀이로 : AI 시대 새로운 노동 패러다임 '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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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에서 놀이로 : AI 시대 새로운 노동 패러다임
서용석
2025-04-28
들어가며
기술의 발전은 인류 역사에서 늘 사회 구조와 개인의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을 촉발했고, 인터넷은 정보혁명을 일으켰듯, 오늘날 AI의 급속한 발전은 지식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근본적으로 뒤바꾸고 있다. 특히 인간의 지적 활동마저 자동화될 수 있는 AI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직업 안정성은 급격히 약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제 지식 노동자들은 단순히 기술 변화에 대응하는 것을 넘어 노동의 본질과 가치를 재정립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AI 혁신은 동시에 노동의 창의성과 놀이적 특성을 강조하는 새로운 패러다임도 제시한다. 네덜란드 철학자 요한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 개념은 이러한 미래 노동관 형성의 중요한 이론적 틀이 될 수 있다. AI가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질적인 창의력과 놀이성을 재발견하며 노동을 삶의 즐거움과 개인적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본고에서는 AI가 초래할 노동 혁명의 양상과 이에 따른 새로운 노동 철학의 필요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AI 혁신에 따른 지식 노동자의 운명
“인간이 도구를 만들지만, 그 도구가 다시 인간을 변화시킨다(We Shape Our Tools, and Thereafter Our Tools Shape Us).” 캐나다의 미디어 학자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이 남긴 이 말은 오늘날 AI가 일으키고 있는 변화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인류는 증기기관을 통한 산업혁명,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한 정보혁명을 거쳐 이제 ‘AI 혁명’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이 혁명은 그 어떤 기술혁신 보다 빠른 속도로 전개되면서, 우리의 삶과 노동 환경을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오픈AI의 공동창업자이자 CEO인 샘 알트먼(Sam Altman)은 AI의 발전을 다섯 단계로 구분했다. 알트먼의 다섯 단계는 우리가 현재 AI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나갈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대화형 AI(Conversational AI)’ 단계다. ChatGPT와 같은 시스템이 이에 해당하며, 사용자는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질문을 명확하게 설정해야 한다. 이는 사용자가 해당 분야에 대해 AI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ChatGPT-3.5까지의 버전은 단순히 사용자의 명령에 반응하는 수준이며, 현재도 코드 생성, 이미지 생성, 문서 초안 작성 등 반복적이고 일상적인 작업에서 활용되고 있다.
두 번째는 ‘추론 AI(Reasoning AI)’ 단계다. 추론 AI는 단순한 응답을 넘어서, 논리적 사고와 추론을 통해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최근 발표된 GPT-4.5는 인간과 유사한 사고 능력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며, 튜링 테스트를 최초로 통과한 AI로 기록되었다. UC 샌디에이고 연구진의 실험에 따르면 GPT-4.5는 73%의 확률로 실제 인간으로 오인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 로펌 Baker & Hostetler는 ROSS라는 AI를 도입해 판례 분석을 자동화하고 있으며, 이는 AI의 법률 분야 진입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AI가 두 번째에서 세 번째 단계로 진화하면서 ‘지식 노동자’의 가치가 급격히 하락할 수 있다. 이미 대규모 데이터 분석이나 법적 서류 작성, 금융 자산 관리와 같은 업무는 이미 상당 부분 자동화가 가능해졌다. 최근에는 디지털 아트 및 콘텐츠 제작 분야에서도 AI 사용으로 작업 효율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해당 분야의 신규 인력 고용이 감소하고 있으며, 기존 인력의 급여 또한 낮아지고 있다. 앞으로는 영상 제작이나 일반 사무 업무 등 다양한 직종에서도 AI의 도입이 확대되며 동일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는 ‘자율 AI(Autonomous AI)’로, 특정 분야에서 인간과 동등한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사용자의 개입 없이도 AI가 독립적으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네 번째 단계는 ‘혁신 AI(Innovating AI)’로 인간보다 뛰어난 성과를 내고, 창의성까지 갖춘 존재다. 이 단계에서는 AI가 단순한 작업 수행을 넘어, 새로운 방식을 창안하고 자율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다.
세 번째 단계에서 네 번째 단계로의 전환기에는 법률, 회계, 의료, 교육, 금융, 연구 등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지식 노동자들도 AI로 빠르게 대체될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JP모건이 도입한 계약서 분석 AI ‘COIN’은 기존 인력이 수년간 수행하던 업무를 수초 만에 처리한다. 이는 앞으로 많은 전문직 분야에서 대량 해고 사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예고한다. AI의 확산과 함께 지식 노동의 가치가 폭락하면서 육체 노동자가 지식 노동자의 가치를 추월하는 역전 현상도 발생할 수 있다. 이후 물리적 ‘AI(Physical AI)’와 결합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육체 노동 시장까지 진입하면서 육체 노동의 가치 또한 급감할 것으로 예상된다.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인 ‘조직 AI(Organizational AI)’는 ‘범용 인공지능(AGI,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의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AI가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학습과 경험을 바탕으로 다양한 업무를 자율적으로 조율하며 수행할 수 있다. 전략 수립, 인사 관리, 조직 운영 전반에 이르기까지, 인간 없이도 기업과 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인간의 노동 수요는 급격히 줄어들 것이며, 특히 고위 관리자나 임원과 같은 직군조차 AI로 대체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노동 시장뿐 아니라 사회 구조 전반에 걸쳐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
AI 발전의 궁극적 단계는 ‘초지능(ASI, Artificial Super Intelligence)’이다. 이는 자아와 독립적 사고 능력을 갖춘 AI로, 인간의 개입 없이 ‘재귀적 자기 개선(Recursive Self-Improvement)’을 통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초지능 단계인 ASI는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 제시한 ‘특이점(Singularity)’의 개념과 맞닿아 있으며, ASI는 모든 인류의 지능을 합친 것보다 뛰어난 수준의 지능을 보유하게 된다. ASI가 실현될 경우, 인간은 AI가 내놓는 해결책을 이해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며, 인류는 AI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국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샘 알트먼은 AGI 도달까지 약 10년을 예상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3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의견도, 또는 아예 도달 불가능하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그러나 AI 기술의 발전 속도를 감안할 때, AGI의 등장은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시각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결국, AI의 급속한 발전은 인간의 삶의 방식과 사회의 작동 원리, 노동의 본질까지도 근본적으로 재정의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간은 어떤 역할을 맡고, 어떤 가치를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는 인류가 앞으로 마주할 가장 본질적이고도 시급한 질문이 될 것이다. 그러나 AI 혁신이 반드시 부정적 결과만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산업혁명과 정보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AI 혁명 역시 새로운 형태의 일과 직업을 탄생시키고, 인간 본연의 특성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와 미래 노동관
산업혁명 이후, 칼 마르크스가 제시한 “노동은 인간의 본질을 실현하는 가장 인간적인 활동”이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사회 전반에 강력한 노동관으로 자리잡아 왔다. 그러나 AI가 급격히 사회를 재편하고 있는 오늘날, 이러한 노동관은 점점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노동은 더 이상 단순한 생계 수단에 머물지 않고, 개인의 관심, 재미, 즐거움, 창의적 성취를 실현하는 활동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새로운 노동관의 정립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이자 철학자인 요한 호이징가(Johan Huizinga)의 ‘호모 루덴스(Homo Ludens)’ 개념은 미래 노동관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호이징가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 중 하나로 ‘놀이’를 강조하며, 놀이가 단지 여가나 현실 도피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이 가장 자유롭고 창의적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본질적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놀이가 사회와 문화의 발전을 촉진하는 근간임을 강조하며, 그 자유로운 특성이 상상력과 창의성을 자극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호이징가의 관점은 오늘날 노동과 놀이의 경계가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현실을 이해하는 데 유효하다. 특히 21세기 들어 등장한 다양한 직업들—유튜버, 스트리머, 인플루언서, 크리에이터 등—은 노동과 놀이를 융합한 새로운 형태로, 전통적인 노동 개념의 경계를 확장시키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성과 창의성을 기반으로 ‘즐기며 일하는’ 모델을 구현하며, ‘놀이-노동(hybrid work-play)’이라는 새로운 노동 패러다임을 실현하고 있다.
앞으로의 노동관은 이처럼 놀이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개인의 내면적 만족과 자기실현을 중심으로 재정립될 가능성이 크다. 과거에는 노동이 생존과 경제적 보상을 위한 수단이었다면, 이제는 즐거움과 창의적 표현, 나아가 사회적·문화적 기여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미래 사회에서는 높은 수입이나 지위보다, 자신이 진정으로 몰입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을 선택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특히, AI 기술이 보편화될 미래에는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노동은 사라지고, 인간 고유의 창의력과 감성을 요구하는 직업들이 중요해질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놀이적 요소는 노동의 필수 조건으로 자리잡을 것이며, 사람들은 일하는 과정에서 더 큰 흥미와 만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AI의 발전은 인간을 의무적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으로 노동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인간은 AI로 인해 발생한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자기 관심사와 놀이적 활동에 투자함으로써 노동의 새로운 의미를 모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에는 과제도 따른다. 먼저, 놀이-노동의 일상화는 노동 시간과 여가 시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과로와 ‘일-생활 균형’ 붕괴의 우려를 낳을 수 있다. 아울러, 성과 중심 조직 문화가 약화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놀이와 노동이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 사회적·제도적 장치 마련이 필수적이다.
AI 혁명은 분명히 기존의 노동 구조를 해체하고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 개념은 미래 노동관을 정립하는 데 있어 가치 있는 지침을 제공한다. 놀이를 포함한 노동은 AI 시대에도 인간의 고유 역량을 강화하고, 더 의미 있고 풍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요소로 기능할 것이다. 결국, AI 시대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인 ‘호모 루덴스-놀이의 인간’을 회복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해 줄 것이다.
카이스트 국가미래전략기술 정책연구소장, 미래전략연구센터장
학력
- University of Oklahoma, Norman, USA. College of Arts and Sciences (1992 – 1996)
- Hitotsubashi University, Japan, Graduate School of Law (1998 – 2000)
- University of Hawaii, Honolulu, HI, USA. Political Science(Futures Studies) (2000 – 2007)
주요 경력
- KT경제경영연구소(선임연구원)
- 한국행정연구원(연구위원)
연구분야
- 주요 분야: Futures Studies, Strategic Foresight, Governance, Theories of Social Change
- 관심 분야: Demographic change, Intergenerational JusticeTechnological Forecasting and Social Changes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보유한 '노동에서 놀이로 : AI 시대 새로운 노동 패러다임 '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단, 디자인 작품(이미지, 사진 등)의 경우 사용에 제한이 있을 수 있사오니 문의 후 이용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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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를 조금 믿어보기로 했다
박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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