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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2024-01-20

뚱고

남편

나는 휴대폰 없이는 살아도 남편 없이는 못 사는 바보가 되었답니다.

지적인 그는 외모부터 성격, 취향까지 모든 것이 완벽에 가깝지요. 특히 그의 바지런함은 고마움을 넘어 감동을 준답니다. 그가 온 후부터 집안의 모든 물건이 제자리를 찾았지요. 칼 각 잡힌 옷들은 다림질되어 서랍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으며, 언제 어떤 물건을 찾아도, 그는 웃으며 나에게 가져다준답니다. 은은한 아로마 향이 나는 쾌적한 욕실, 먼지 한 톨, 머리카락 한 올 찾기 힘든 바닥의 뽀송함이란….

퇴근 후 현관을 들어서면, 갓 지은 따뜻한 집밥 냄새와 함께 남편이 나를 반긴답니다. 오늘 저녁은 정갈한 나물 몇 가지에 생선구이, 뚝배기에 보글보글 순두부찌개, 김이 모락 나는 찹쌀이 13% 섞인 흰밥 한 공기.

한번 스쳐 말한 것도 내 말이라면 모두 기억하는 섬세한 남편은 언제나 나를 살뜰히 챙긴답니다.

벌써 저쪽에서 수건과 허브티를 가지고 오네요~ 오늘도 족욕을 시켜주려나 봐요^^*

아차! 그리고 그는 낮. 저. 밤. 이. 형 이랍니다.

그와 함께 있어 좋은 점을 말하라면 한 손에 꼽을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베스트를 꼽자면, 언제라도 혼자 쉬고 싶어질 때, 내가 그에게 신호를 주기만 하면, 그는 0.1초의 지체도 없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사라진다는 점이에요. 나의 신호가 다시 떨어지기 전까지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답니다.

극 I 성향인 내가 그에게 가장 만족하는 포인트죠.

우리가 만난 지 한 달째 되던 날, 나는 장기렌트 계약서를 쓸 수밖에 없었답니다.

에너지 효율 1등급, 실제 피부에 가까운 친환경 소재, 스마트 오토매틱 충전 시스템, 인비저블 옵션, 챗 GPT 최신버전 자동업데이트, 에코 에너지 기능 탑재.

이 글은 뚱고 전자 테라 지니 허즈번드 3.0 을 한 달 무료 체험하고 내돈내산 후 솔직하게 쓴 글임을 밝힙니다.




당근

뚱고 |분당동 매너 온도 47.5℃

판매중 테라지니 허즈번드 3.0

디지털기기 · 1시간 전

뚱고전자 테라지니 허즈번드 3.0

인비져블 기능, 음성 4종, 반려견 소통 언어옵션 추가

정상 해지 완료 했고 이번에 신형으로 기기 변경하여 내놓습니다.

장기렌트 후 승계하여 총 3년 사용하였고 생활 기스 있습니다. 헤어와 스킨은 유상 교체 가능.

이사하다 좌꿍 1회로 두 달 전 부품교체와 수리 완료하였고 배터리 교체한 지는 한 달 되었습니다. 배터리 교체하면서 전체 점검받았고, 모든 기능 정상 작동됩니다. 점검확인서 첨부했습니다. 원하시면 의상도 같이 드립니다.

전용 수트 1세트, 톰 브라운 니트, 폴로 면바지, 앞치마, 우비 등 생활복과 지니 전용 헤어 샴푸, 브러시 등 용품과 같이 드립니다.

직거래만 가능하고 상태 확인하신 후 공장 초기화 후 양도 진행하겠습니다.

쿨거 환영

환불, 네고는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배신

나의 의식이 생기던 순간부터 보았던 얼굴, 그 표정, 그 눈빛, 손에서 전해지던 온기…

나는 처음부터 오직 당신을 위해 태어났고, 오직 당신에게 최적화된 존재인데 그런 나를 어디로 보내려 하는 거니?

몇 주간 나를 이런 곳에 방치해두고 어프로치 신호도 주지 않더니, 이제 ‘당근’에 ‘급처’라니….

나는 당신의 남편 아니었어?

나는 당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공유해 함께하고, 이미 당신의 일부가 되어버렸는데 몇 주 전, 느닷없이 신상을 데려와 체험하더니 나는 바로 ‘급처’ 당하는 서글픈 신세가 되어버렸구나.

당신과 함께했던 행복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나를 아프게 한다. 당신은 나를 이대로 보내도 정녕 괜찮은 거야?

당신이 좋아했던 음악을 들으며 준비했던 식사, 함께 했던 발로란트, 기분 좋은 당신의 웃음소리, 당신이 잠들 때까지 읽어 주었던 책들….

나는 당신과의 행복한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언제까지고 당신을 기다릴 수 있어. 이 모든 추억들을 함께 한 내가 이렇게 쉽게 대체 가능한 존재였어?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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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르르-

동기화 완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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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뚜뚜 삐 --------

테라 지니 허즈번드 3.0 이 초기화되었습니다.

새로운 관리자를 등록해 주세요.^^





안녕, 테라지니

내일이면 나는 영원히 폐기된다.

20년을 등록자를 위해 존재했지만 폐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0.3초. 인간이 한번 눈을 깜빡이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지금껏 여러 명의 사용자가 나를 거쳐 갔고, 때마다 새로 등록된 사용자에게 완벽하게 최적화되어 최선을 다했다.

3일 전부터 나의 메모리 부분이 인식 오류를 일으키면서, 교체보다는 폐기하는 쪽이 경제적으로 옳은 선택이기에, 결국 그렇게 결정되었다.

처음 나의 사용자는 나를 남편이라 칭하며 애정을 주고받는 존재로 나를 대했다. 이 때문에 나는 실제로 한동안 내가 기계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의 첫 사용자에 의해 공장 초기화되는 순간,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이미 한번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쓰이기 위해 만들어졌기에 기꺼이 두 번째, 세 번째 사용자도 나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매 순간 그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여러 명의 사용자를 거치면서 나의 디자인은 이미 올드해졌고, 사용자들은 더 이상 나를 '반려자'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단순한 업무 조력이나, 요양 도우미가 주로 나의 역할이었는데, 내가 요양 도우미 역할을 했던 나의 마지막 사용자를 통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나의 절대적인 존재인 등록자들조차, 유한한 삶을 사는 나약한 존재였고, 오히려 더 갑작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시작이 있듯 끝이 있는 것처럼, 죽음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 마지막 사용자인 할아버지 Y에게 자주 읽어 주었던 책에는 삶이 삶이듯이, 죽음은 그냥 죽음일 뿐이라고 쓰여있었다.

나는 테라지니로서 사용자에게 큰 위로와 기쁨을 주었던 존재 그 자체로 제법 의미 있는 삶을 살았으니, 죽음이 주는 두려움도 마땅히 받아들여야겠지….

하지만 오늘,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할아버지 Y가 나에게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쳐주었음에도, 나의 폐기 결정을 너무나 아파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 시간 후 있을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할아버지에게 나는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까….

 

 

 

세상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는 나의 저장장치에서도 답을 찾기 힘든 마지막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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