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나에게 ‘탱고’와 다소 부담스러운 ‘붉은 정열’이 떠올려지는 도시일 뿐이었다. 무언가 특별히 매력을 느낄만한 요소도 없었다. 다소 거리감마저 느껴져 버킷 리스트에 있던 여행지는 아니었다.
시작은 이번 겨울 방학 동안 스위스를 거쳐 유럽 남부를 가야겠다는 아이의 소망이었지만 ‘추운 겨울에 가긴 어딜 가느냐’며 귓등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급기야 혼자 웅크려 누워 눈물방울을 떨구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발단돼 갑작스레 결정해 버린 즉흥적인 여행이었다.
가기 전 부랴부랴, 비행기에서도 여행지의 역사에 대한 책을 읽어봤다. 세계사에 관심이 있다고 했지만, 스페인을 통일한 이사벨 여왕에 대한 이야기는 생소했다. 콜럼버스의 묘가 있고 이슬람과 기독교 양식이 혼재해 있다는 성당 정도가 눈에 띄었다.
‘세비야’, 처음 이 도시에 들어서서 눈에 띈 것은 중세 유럽의 영광이 느껴지는 성당도 유수한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도 아니었다. 나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니라 도시 곳곳에 늘어선 ‘오렌지 나무’였다.
푸른 나무마다 알알이 맺힌 주황빛 오렌지는 마치 크리스마스의 트리에 매달린 반짝이는 작은 불빛처럼 이 도시를 장식하고 있다. 이 도시는 내가 기대했었던 이곳의 역사만큼 복잡 미묘하거나 ‘탱고’처럼 처연함이 느껴지는 도시가 아닌, 경쾌한 주황빛이 온 도시를 장식하는 그런 곳이다.
유럽의 겨울은 쉬이 비가 내리기도 하지만 비가 그치고 개인 이곳의 한낮은 따스한 햇살로 물들여진다. 재킷쯤은 벗어던져도 될 법은 따뜻한 겨울 햇살에 짧지 않은 시간을 건너온 나의 마음도 녹아 내리는 듯하다.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가 혼재한 이곳은 도시의 다양한 건축 양식에서 그 너그러움을 발휘했듯이 이국의 여행자에게도 한없이 따뜻하다. 가로수에 매달린 오렌지의 선명한 주황빛처럼 마음도 발걸음도 가볍게 튀어 오른다.
이 도시의 밤 풍경은 좁디좁은 골목길을 비추는 가로등으로 인해 더 없이 아늑해진다. 언젠가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고 큰 여운을 느낀 적이 있는데, 마치 그 영화 속의 거리로 성큼 들어선 것 같다. 가로등 하나에 의지에 골목 골목을 지나 만나게 되는 작은 광장들에서 스페인 사람들 특유의 경쾌함을 마주치게 된다.
스페인 사람들의 ‘수다’는 세계에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일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수다를 떠느라 하던 일을 멈추기도 하고 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실제로 상점에서 계산하다 말고 다른 손님과 수다를 떠느라 하던 일을 멈추거나 우리나라 같으면 투숙객이나 승객을 위해 조용한 호텔이나 기내에서 왁자지껄 신나게 수다 떠는 직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이곳의 저녁은 통상 8시에 느지막이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시작된 저녁 식사 시간이 밤 늦게까지 이어져 광장은 수다와 웃음으로 가득하다. 언젠가 말로만 들었던 스페인의 낮잠 시간인 ‘시에스타’가 설마 진짜 있을까 싶었는데 한낮에는 관광지의 식당도 상점도 모두 닫히는 것을 보고 이후에는 식사 시간도 열심히 챙겨야 했다.
저녁 7시경 백화점 식당가에 갔는데 아무도 식사를 안하고 음료만 마시는 광경을 보고서야 8시 이전엔 식사 주문도 안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일단 생체 리듬부터 바꿔야 하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작은 불편과 낯선 문화는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미이기에 그 자체가 설렘이다. 식사 시간도 하루 이틀이 지나니 얼추 맞춰서 늦은 저녁의 타파스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여행을 나설 때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유적지나 경이로운 자연 풍광을 기대하곤 했다. 하지만 세비야, 이 낯선 도시에서의 며칠은 주황빛 햇살에 천천히 물드는 그런 시간이었다. 처음엔 짜게만 느껴졌던 이들의 음식에서 그 자체의 특별한 맛을 즐기게 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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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주황빛의 도시, 세비야
2024-02-21
블루아워
그곳은 나에게 ‘탱고’와 다소 부담스러운 ‘붉은 정열’이 떠올려지는 도시일 뿐이었다. 무언가 특별히 매력을 느낄만한 요소도 없었다. 다소 거리감마저 느껴져 버킷 리스트에 있던 여행지는 아니었다.
시작은 이번 겨울 방학 동안 스위스를 거쳐 유럽 남부를 가야겠다는 아이의 소망이었지만 ‘추운 겨울에 가긴 어딜 가느냐’며 귓등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급기야 혼자 웅크려 누워 눈물방울을 떨구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발단돼 갑작스레 결정해 버린 즉흥적인 여행이었다.
가기 전 부랴부랴, 비행기에서도 여행지의 역사에 대한 책을 읽어봤다. 세계사에 관심이 있다고 했지만, 스페인을 통일한 이사벨 여왕에 대한 이야기는 생소했다. 콜럼버스의 묘가 있고 이슬람과 기독교 양식이 혼재해 있다는 성당 정도가 눈에 띄었다.
‘세비야’, 처음 이 도시에 들어서서 눈에 띈 것은 중세 유럽의 영광이 느껴지는 성당도 유수한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도 아니었다. 나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니라 도시 곳곳에 늘어선 ‘오렌지 나무’였다.
푸른 나무마다 알알이 맺힌 주황빛 오렌지는 마치 크리스마스의 트리에 매달린 반짝이는 작은 불빛처럼 이 도시를 장식하고 있다. 이 도시는 내가 기대했었던 이곳의 역사만큼 복잡 미묘하거나 ‘탱고’처럼 처연함이 느껴지는 도시가 아닌, 경쾌한 주황빛이 온 도시를 장식하는 그런 곳이다.
유럽의 겨울은 쉬이 비가 내리기도 하지만 비가 그치고 개인 이곳의 한낮은 따스한 햇살로 물들여진다. 재킷쯤은 벗어던져도 될 법은 따뜻한 겨울 햇살에 짧지 않은 시간을 건너온 나의 마음도 녹아 내리는 듯하다.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가 혼재한 이곳은 도시의 다양한 건축 양식에서 그 너그러움을 발휘했듯이 이국의 여행자에게도 한없이 따뜻하다. 가로수에 매달린 오렌지의 선명한 주황빛처럼 마음도 발걸음도 가볍게 튀어 오른다.
이 도시의 밤 풍경은 좁디좁은 골목길을 비추는 가로등으로 인해 더 없이 아늑해진다. 언젠가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고 큰 여운을 느낀 적이 있는데, 마치 그 영화 속의 거리로 성큼 들어선 것 같다. 가로등 하나에 의지에 골목 골목을 지나 만나게 되는 작은 광장들에서 스페인 사람들 특유의 경쾌함을 마주치게 된다.
스페인 사람들의 ‘수다’는 세계에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일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수다를 떠느라 하던 일을 멈추기도 하고 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실제로 상점에서 계산하다 말고 다른 손님과 수다를 떠느라 하던 일을 멈추거나 우리나라 같으면 투숙객이나 승객을 위해 조용한 호텔이나 기내에서 왁자지껄 신나게 수다 떠는 직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이곳의 저녁은 통상 8시에 느지막이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시작된 저녁 식사 시간이 밤 늦게까지 이어져 광장은 수다와 웃음으로 가득하다. 언젠가 말로만 들었던 스페인의 낮잠 시간인 ‘시에스타’가 설마 진짜 있을까 싶었는데 한낮에는 관광지의 식당도 상점도 모두 닫히는 것을 보고 이후에는 식사 시간도 열심히 챙겨야 했다.
저녁 7시경 백화점 식당가에 갔는데 아무도 식사를 안하고 음료만 마시는 광경을 보고서야 8시 이전엔 식사 주문도 안 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일단 생체 리듬부터 바꿔야 하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작은 불편과 낯선 문화는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미이기에 그 자체가 설렘이다. 식사 시간도 하루 이틀이 지나니 얼추 맞춰서 늦은 저녁의 타파스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여행을 나설 때면 역사적으로 유명한 유적지나 경이로운 자연 풍광을 기대하곤 했다. 하지만 세비야, 이 낯선 도시에서의 며칠은 주황빛 햇살에 천천히 물드는 그런 시간이었다. 처음엔 짜게만 느껴졌던 이들의 음식에서 그 자체의 특별한 맛을 즐기게 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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